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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모음/외부자료

21세기 한국 노동 현실 상황도 - <노동여지도> (박점규, 알마)

by 더불어삶 2016. 2. 20.

지난 1월 30일 토요일, 더불어삶은 박점규 작가의 <노동여지도>로 신년 첫 월례책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노동여지도!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책입니다. 한국의 노동 상황을 가지고 지도를 만들겠다는 발상이 기발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책은 작가가 전국 28개 도시 및 지역을 두 발로 직접 뛰면서 그려낸 21세기 한국 노동 현실 상황도입니다. 각 도시의 현재 상황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 곳의 노동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본문에는 몇 가지 구체적이고 중요한(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사례들을 한 눈에 보기 쉽게 잘 요약해 줍니다. 굳이 순서대로 처음부터 다 읽어나갈 필요 없이, 관심 가는 지역부터 뽑아서 읽기 시작해도 좋은 구성입니다. 28개 도시의 수 많은 사례들이 일괄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당당하게 보장받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책의 전반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좋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책의 163쪽에는 과거 구로 공단 시절부터 일회용 의료기를 만들어온 한국메티칼샤프라이의 사례가 나옵니다.

 

“1990년대 가장 열악했던 공장이 지금은 가장 나은 사업장이 됐다. 노조가 소중한 이유다.”

 

203~204쪽에 걸쳐서 노동사회교육원 소장 김정호씨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삼성전자서비스 젊은 친구들에게 노동조합이 따낸 것도 없는데 좋은 게 뭐냐고 물으니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다는 거야. 또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거야.”

 

270쪽에는 태안화력복합발전소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고 있는 40대 노동자 김준수씨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8시간 노동제가 안 됐을 때는 유화단지에서 사람 엄청 죽었어유. 일에 쫓기고 경쟁 붙고 장시간 일하고. 5,000~6,000명 투입되는 현장에서 보통 대여섯 명이 죽었어유. 노동조합이 생긴 뒤로 한 공사에 5,000명이 들어갔는데 1명도 안 죽었죠.”

 

노동조합은 일터의 환경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의 목숨도 구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강한 노동조합의 활약 사례들이 이를 든든히 뒷받침해 줍니다. 민주 노동조합이 회사 식판까지 바꿔줬다는 경주의 자동차 시트 제조회사 다스는 강력한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고, 정부의 조직적인 탄압도 이겨냅니다. 아산의 유성기업은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의 강력한 힘 덕택에 공장 내에 비정규직이 단 1명도 없고, 주간 연속 2교대를 현대차보다 먼저 실시한 바 있습니다.

 

     둘째. 한국에서는 근로기준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정당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책에는 노동조합이 성공하는 사례보다는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그 위세를 잃어가는 사례가 더욱 많습니다. 노동과 노동조합은 한국에서 굉장히 박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책에서는,

 

한국에서 노조를 만드는 일은 독립운동에 가깝다.”(196)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땅투기병을 비롯해 명문학교병’ ‘노조혐오병이라는 3대 중병에 걸린 환자들이 많은 나라다.”(200)

 

와 같은 글귀로 한국의 노동 인식을 보여줍니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유지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노동조합이 약하거나 없으니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습니다. (불법)인력파견회사가 활개치고 있는 안산에는 수많은 조그만 공장들에 노동자들이 소수로 잘게 퍼져있어 노동조합을 세우는 것이 힘들고, 노동조합이 없으니 이 노동자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하여 불법파견이 더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월공단에서 작가가 만난 한 청년은 파견노동의 3대 공통점은 장시간 노동, 월급 120만원, 고용불안이었다고 설명합니다.(187) 인천 국제공항의 사례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오히려 비정규직을 확산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계 공항서비스 9연패를 자랑하는 인천 공항이 세계 비정규직 1위 공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구미의 섬유공장 스타케미칼은 사장 김세권이 헐값에 사들여서 비싼 값에 팔아 치우면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지만, 그로 인해 아무 잘못 없는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게 되자 해고자 차광호씨가 408일에 달하는 최장기간의 고공농성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노동의 현실은 힘들지만, 많은 한국 사람들이 노동의 현실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셋째. 이렇듯 현실은 힘겹지만, 그래도 노동과 노동조합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비정규직과 파견을 늘리고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노동개악을 강도 높게 추진해 나갈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힘을 모아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노동조합입니다. 책에는 아무리 탄압받고 깨져도 끝까지 노동조합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수많은 죽음과 상처를 초래한 오랜 탄압과 싸움 끝에 최근에 복직된 쌍용 해고노동자들이 그렇고, 혹독한 노동조합 초토화 전쟁을 이겨낸 안산 자동차부품업체 에스제이엠 노동조합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비정규직 1등 인천 공항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싸우고 있습니다. 당진 화력발전소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이 타향으로 강제전출 당하고, 끊임없이 협박과 회유를 당하는 등의 탄압을 당한 결과 1,300명이던 노동조합원이 300명까지 줄어들었지만, 남은 이들은 끝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까요? 인천 소래포구에서 주차관리원으로 일하는 강명자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할 소리를 하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게 뭔지 알게 됐어요. 우리가 뭉쳐서 싸웠기 때문이죠.”

 

아무리 힘겨워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희망이 있기에 한국의 살인적인 탄압의 와중에도 10%라도 되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유지되는 지도 모릅니다.

 

 

 

     앞서 서술했듯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노동 현실에 대해 무감각합니다. 자신과는 상관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제일 큰 이유일 것입니다. 무관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절규에 대해 두 눈 감고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관심을 끝내야 합니다. 이 책에는 노동자들의 이름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일해 왔고, 어떻게 싸워 왔는지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의 출발점이자, 관심의 시작입니다. 노동여지도는 힘든 이웃들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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