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노동, 빼앗길 수 없는 희망>(박일환, 우리학교)

서재 2021. 4. 28. 14:00

부당해고에 맞서 희망을 쟁취하다
[서평] 세 번 싸워 세 번 이긴 시그네틱스 노동자들 투쟁 이야기

 

▲ 매주 수요일 진행되는 동화면세점 선전전. 피켓 내용이 투쟁의 오랜 세월을 보여준다. ⓒ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노동유연화라는 흐름 속에서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를 당하는 노동자들은 곳곳에 있다. 그러나 같은 직장에서 무려 네 번이나 해고를 겪은 노동자들은 전례가 없을 것이다. 회사가 비정규직만으로 이뤄진 공장을 세우고 싶어서 쫓아낸 사람들. 바로 영풍그룹 산하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다.

 

시그네틱스라는 이름이 생소하다 해도, 영풍문고는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시그네틱스는 영풍그룹의 계열사다. 영풍은 소위 재계 순위에서 항상 20위권을 유지하면서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견실한 그룹이다. 그 영풍이 원래 거평그룹 소속의 반도체 업체였던 시그네틱스를 인수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거평그룹이 IMF 이후 몰락하기 전, 시그네틱스 공장은 서울 염창동에 있었다. 거평은 그 공장을 담보로 파주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전부 새 공장으로 이동시켜주겠다고 노동조합에 약속했다. 그러나 시그네틱스를 새로 인수한 영풍그룹은 그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다.

 

영풍의 계획은 파주 공장을 100% 비정규직 공장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계획에 방해가 될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안산에 새로 세우는 공장으로 보내려 했다. 안산에 가지 않을 사람은 퇴직하라고 강요했다. 파주 공장이 이미 세워진 상황에서 안산의 신규공장은 불필요한 중복투자였고, 들여놓은 기계도 낡은 기계들이었다. 형식적으로 운영하다가 폐업이라는 방식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 당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으며, 평균 입사 경력 13년에 70% 이상이 기혼이었다. 따라서 시그네틱스를 중요한 생계 터전으로 삼는 동시에 평생직장으로 여기며 근무해 왔다.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사해서 청춘을 바친 공장이라 애착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런 애착이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 배신감과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신들을 한낱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여겨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노동자들이 바라는 건 고용안정 한 가지였다. 하지만 안산공장으로 가는 순간 고용보장은 장담할 수 없었다.

 

 

▲ 책표지 ⓒ 우리학교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영풍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저항했다. 기존의 약속을 지켜 파주공장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해고로 답했다(1차 해고).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고 투쟁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공장점거, 영풍그룹 앞 농성, 고공농성, 단식농성 등 노동자들은 안 해본 것이 없다. 그 와중에 영풍그룹 산하의 석포제련소에서 발생한 불법적인 환경오염과 산업재해에 대해서도 밝혀낸 바 있다.

 

법정투쟁도 해 나갔다. 법원은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비록 노동조합 간부들과 (회사에서 몰래 찍은 염탐자료를 기반으로 한) 11명의 소위 '적극가담자'를 제외한 복직이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이 옳았다는 명명백백한 증거였다. 노동자들은 안산공장에 복직했지만 사측은 일을 주지 않거나 부당해고 기간 동안 밀렸던 월급 지급을 최대한 늦추는 등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안산공장과 새로 생긴 광명공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2차, 3차, 4차 해고가 이어졌다. 2차, 3차, 4차 해고 모두 사측에서 공장사정이 어렵다는 핑계로 휴업한 뒤 희망퇴직을 받고, 공장을 폐업하면서 해고했다. 투자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장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한 것은 안산공장과 광명공장에 근무하는 직접고용 노동자들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입장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단 한 번의 해고도 노동자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는 고통인데,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이를 거듭 네 번 겪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굴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생산직 정규직 제로인 '꿈의 공장'을 만들겠다는 시그네틱스 사측의 의도는 관철되지 못했다.

 

시그네틱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주노조를 없애려고 들었다. 그래서 어용노조까지 만들어가며 민주노조를 눈앞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계속 투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세 번의 법정투쟁에서 어떻게 이겼을까? 스스로가 옳다는 믿음과, 정년퇴직을 앞두고도 기꺼이 투쟁에 동참하게 만드는 뜨거운 동료애가 답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싸움을 포기하면 영풍 자본이 한 일은 아무 문제없는 게 되고, 다른 회사도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지 않겠냐"라고 말한다.

 

"저희는 노동조합 조합원이라는 것밖에 없거든요. 부당하게 뭘 요구하거나 그런 적이 없는데 조합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 번씩 해고시키고 길거리로 내몰았어요. 이 과정에 세 명의 조합원이 돌아가셨습니다. 다 복직하고 싶다는 마지막 염원을 제 가슴에 남기고 갔거든요." (윤민례 분회장)

반도체를 만들며 노동조합 활동을 했을 뿐인데 한 사업장에서 4번의 해고를 당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사례가 또 있을까? 그래도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나'보다 '후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해고 금지, 비정규직 철폐를 힘차게 외치고 있다.

 

<빼앗긴 노동, 빼앗길 수 없는 희망>은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세 차례의 해고라는 냉혹한 현실을 믿음과 동료애로 돌파하는 과정을 담았다 (4차 해고는 책 발간 이후). 제목 그대로 냉정한 현실과 희망을 함께 이야기하는 책이다.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매주 수요일 7시 광화문역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1인 피켓시위가 진행됩니다.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동참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주세요!

 

posted by 더불어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