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며 절규하며 시작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51일 만에 일단락되었습니다. 노사 합의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는 ‘불법'과 ‘공권력 투입'을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했죠. 그리고 정부가 찍은 ‘불법' 낙인을 이용해 회사는 수천억 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물리려 합니다. 20년 가까이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최저시급 9160원을 받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손배)·가압류는 삶을 포기하라는 선고와 다를 바 없습니다.
노동자들을 짓밟는 손배가압류
“이자가 붙는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어요. 어떻게 되려나. 저는 이제 아무것도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해요. 사람이 힘들어서 죽는 게 아니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뭔지 제가 너무 잘… 알죠.” - 최정명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 (시사인 인터뷰 중)
최 씨는 2015년 기아자동차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 전광판 위에서 364일간 고공 농성을 벌인 후 해고당했어요. 직후 사측이 5억8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2016년부터 집 가전제품과 가구 등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고 합니다. 연 14~15%씩 지연이자가 붙으니, 이자만 매년 약 9000만원. 같은 불법파견 문제로 2018년 8월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쟁의행위를 한 비정규직 노동자 7명에 대해서도 지난 6월 1억7천만원이 넘는 손해배상이 선고됐습니다. 금전적 압박은 심각한 생활고로 이어져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그 가정까지도 파괴합니다.
헌법은 노동자들의 기본권으로 노동3권(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기업과 정부는 노동자가 파업 등 쟁의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수천만 원에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액수를 노동조합뿐 아니라 노동자 개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이에 노동자들이 불복하여 법원에 가면, 법원도 노동자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합니다. 법원이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고, 이를 확정하면 확정일까지 5%였던 이자가 확정일부터 12%(때때로 15, 20%까지도 적용)로 치솟습니다. 지연이자가 선고 금액을 역전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많은 노동자가 손배가압류로 고통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그에 반해 쟁의행위에 나서게 된 원인을 제공한 회사와 국가는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게 씁쓸하고 화가 나는 현실입니다. 아주 드물게 유성기업에서 실현된 창조컨설팅 노조파괴시나리오가 유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노조파괴 과정에서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제기된 손배소는 면책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사측이 손해배상 청구를 ‘손해를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3권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노동조합 탈퇴를 조건으로 손배소 취하 제안, ▲수십억 손해배상을 근거로 ‘불법파견 소송' 및 ‘근로지위확인소송'를 취하하도록 협상, ▲노동조합 해산 및 해고자복직 투쟁 포기 종용 등 사례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외면
‘손잡고'는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의 줄임말로, 2014년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회사와 국가가 47억 원의 손배 폭탄을 청구하자, 이를 함께 이겨내자는 ‘노란봉투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노동자의 삶과 노동3권을 유린하는 손배가압류를 막아내기 위한 ‘손잡고' 단체 출범으로 이어졌는데, 이때 출범 발기인 중 한 명이 바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존중'을 약속한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손배가압류는 계속되었다는 거, 손배가압류를 막기 위한 그 어떤 정부 차원의 행동은 없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2019년 문재인 정부의 공공기관인 한국도로공사가 톨게이트 수납원 5명과 소속 노동조합 및 그 간부를 상대로 1억원 손해배상을 청구했어요. 당시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용역업체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도로공사의 지휘, 명령을 받으며 일해왔기에, 도로공사를 향해 ‘직접 고용'을 하라고 점거 농성을 벌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대법원에서도 ‘불법 파견' 판결까지 내렸던 터라, 한국도로공사가 오히려 적반하장인 격이었음에도 손배 폭탄으로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겁니다.
한국 정부와 국회가 무분별한 손배가압류가 가져오는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자, 국제사회는 수차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만 두 차례- 권고를 보냈습니다. 2017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 보고서는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라고 적시하며 노동자 파업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라고 강조했어요. 같은 해 10월, 유엔 사회권위원회에서도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가 지속되고 있는 등 쟁의행위 참가 노동자를 상대로 한 보복조치”라 명시하고 “당사국의 자제와 독립조사 실시"를 권고했습니다. 이 권고사항들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아무 답변이 없었어요. 아니 관련한 손배가압류 실태조사도 진행하지 않았어요.
노동자와 시민이 함께 해결해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판매직, 택배노동자, 보험설계사와 같이 특수고용노동자, 그리고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까지 손배청구소송의 대상이 확대됐어요. 기술이 발전하고 플랫폼 기업의 대거 등장으로 다양한 노동 형태가 등장하자, 손배가압류의 폭탄 대상도 확대된 거라 봐야 하겠죠. 그동안 정부가 ‘손 놓고' 있는 동안 노동권을 짓밟기 위한 방식은 날로 교묘해지고 있네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이 일단락된 이후, 손해배상 문제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노란봉투법' 통과를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지난 5년간의 무관심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큰 기대가 생기지는 않네요.
노동자에게 과도하게 책임을 묻는 반면 압도적으로 큰 권력을 가진 회사와 국가에는 면죄부를 주는 손배가압류! 이제 손배가압류의 폐지를 위해 노동자와 시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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