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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더불어삶이 만난 사람들

[인터뷰]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홍종인 전 지회장(16.05.31) by 더불어삶

by 더불어삶 2016. 6. 10.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홍종인 전 지회장 인터뷰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 열사가 유성기업의 노조파괴로 인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운명하신지 80일이 넘었습니다. 1년을 이틀 앞두고 며칠 전 363일만에 고공농성을 마무리하는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문제처럼 현대차의 개입이 자료를 통해 명확히 드러났으나 사측과 국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 노동자들의 내면을 파괴하는 노조파괴 공작으로 노동자들과 그 가족은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현대차와 유성기업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유성기업에서 노조파괴 공작이 진행되던 2011년부터 노조파괴에 맞서며 얼마 전까지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 지회장으로 활동했던 홍종인 전 지회장을 만나 유성기업과 현대차의 노조파괴, 그리고 노조파괴로 인한 영향, 지회의 싸움 등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인터뷰는 지난 5월 31일 지회가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양재동 현대차 본사 근처 커피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유성기업은 노조파괴가 시작되기 전 노사가 무리한 새벽근무를 하지 않는 주간 연속 2교대근무를 합의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유성기업에서 초창기 주간 2교대가 아니라 주야 맞교대 2교대를 했을 때에는 주간조는 8시 반부터 5시 반까지 8시간 근무를 하고 잔업을 4시간까지 했어요(12시간 근무). 그러면 야간조는 10시에 출근해서 아침 6시까지 8시간 근무, 잔업 2시간을 하면 8시가 됩니다(10시간 근무). 각 조 사이에 30분만 간격 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계는 24시간 돌아간 것이죠. 당시 심야노동을 하면서 사망한 동지들까지 생기고 심근경색, 급성 폐혈증, 우울증 등이 발병했어요.

 

 

그럼 합의하신 주간 연속 2교대제에 관해 말씀해주시죠.

그래서 지회의 투쟁으로 2009년에 주간 연속 2교대제에 관해 사측과 합의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2010년도에는 주간 연속 2교대근무 준비팀을 구성하고 2011년도에 시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근무시간이 법정근로시간을 한참 초과하기 때문에 지회에서는 주간 연속 2교대제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잔업시간을 통제해서 잔업시간을 2시간으로 줄였죠. 대신 조합원 수당이라는 것을 신설하여 전에 받던 잔업 수당이 유지되게 했습니다.

당시 현대차도 주간 연속 2교대에 합의를 했었고, 8-8(2교대로 8시간씩 근무), 9-9 등 여러 안이 얘기되다가 유성지회가 얘기했던 8-8은 현대차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유성이 자동차의 엔진을 생산하는 업체였기 때문에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에는 모든 라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타격이 되기 때문에 현대차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2011년 당시 경총 등에서 ‘1000원짜리 피스톤링이 완성차 라인을 세웠다는 등의 언론 플레이를 하였어요. 유성기업이 생산하는 엔진에 대한 중요성, 자기들이 선시행하지 못하고 부품사 먼저 주간 연속 2교대제로 간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당시부터 현대차와 유성기업은 노조파괴를 위해 준비해오고 있었던 것인가요?

이미 2009년 쌍용차 사태 이후 발레오만도, 보쉬전장, 상신, 유성기업, SJM 등 지역별로 강성이라고 생각되는 노조를 깨부수고 지역 전체가 기죽게 만드는 작업이 있었어요. 우리가 입수한 노조파괴 문건만 보아도 노조 집행부 성향이 어떤지 자세히 파악해서 각 노조를 다 깨버린 게 나와요. 유성도 2011518일 당시 지역에 있는 금속노조 산하 부품사 노조에 현대차 직원들이 직접 들어와서 여기에 연대하거나 결합하면 다음은 당신들의 노조가 노조파괴 대상이라고 경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사업장 연대 단위가 확 줄었어요.

노조파괴가 한참 이루어지던 당시 진상조사단을 꾸려서 울산까지 내려갔는데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사업장 때 그랬는지 이름을 밝히는 걸 꺼리는 걸로 봐서는 현대차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요. 충남의 노조들도 내가 지회장하던 당시에 술 마시다가 따로 와서 그때 더 도와주고 싶었지만 현대차의 압박으로 그럴 수 없었다고 사과할 정도면 현대차가 얼마나 깊숙이 개입돼있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죠.

자료를 보면 아시겠지만 현대차에서 직접 지시, 회의 소집, 책임추궁을 하는 것들이 직접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보다 더한 행동들을 했을 거예요. 

참고: 현대차가 ‘유성기업 노조 파괴’ 시나리오 썼다 <경향신문 2016.01.28>

 

 

한광호 열사가 운명하신지 76일째인 5월 31일 열린 한광호 열사 추모 문화제

 

유성기업 노조는 복수노조법, 사측의 어용노조를 통한 파괴 공작 등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민주노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건강한 민주노조를 지킬 수 있었나요?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유성기업이 1959년 처음 설립됐고 1961년경 노동조합이 처음 설립증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이름만 노동조합인 어용노조였죠. 임금 인상도 관리자에게 말을 잘 듣거나 일찍 나와 일하면서 충성하면 개별적으로 인상시켜주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노예 같은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시기였죠. 그러다가 한국 현대사처럼 유성에서도 87년 투쟁 이전부터 민주노조 사수 투쟁이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 민주노조로 전환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당시 유성기업이 있었던 부천 지역에서는 민주적 노조활동으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천에서 도시화 계획으로 공장을 없애면서 2000년 아산으로 공장을 이전하게 되고, 아산지역에서도 상당히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노조로 알려져 있었어요. 근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창립을 도와주는 적극적인 활동을 했는데 현대차나 유성 사측에는 그때 상당한 강성노조로 인식이 박혔을 거예요. 2011년 직장폐쇄, 노조파괴 시나리오 과정도 유성기업 노조가 활발히 활동하기 때문에 본보기로 깨버린 것으로 볼 수 있죠.

그런데 특이한 점은 유성기업의 채용형태가 공개채용이 아니라 인맥을 통한 가족채용이라는 점이에요. , 친인척, 형제, 부모자식이 같은 사업장에 있는 것이죠. 어떤 가족은 가족 5명이 관리자이고 1명이 생산직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유성기업은 평균 근속기간이 20여년 가까이 된다는 거예요. 그 기간을 한 직장에서 가족, 친지들과 한솥밥을 먹고 애들이 커가는 것을 같이 보면서 지내다가 복수노조, 어용노조를 통해 그러한 관계가 한순간에 깨지기 시작한 거예요. 누구보다도 믿었던 이 친구가, 이 형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우리를 배신하고 어용노조로 가는 상황이 연출되는 거죠. 여기서 생기는 배신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처음에 복수노조를 악용해서 노조파괴를 하려고 시작했던 사측의 전략이 정확하게 먹힌 것이죠. 노사문제가 노노문제로 바뀌게 된 거예요. 조합원들이 어용노조로 갔던 조합원들을 다시 받아줘야 우리가 이긴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다시 배신하기 때문에 배신한 조합원을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조합원들의 심리상태가 됐어요. 그래서 내가 지회장일 당시 조합원들과 술 한 잔 하면 조합원들이 이 사람들을 받으면 자기가 어용에 가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같은 협박 아닌 협박을 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심각했죠.

그런데도 조직이 깨지지 않고 어떻게 유지가 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면, 말씀드린 대로 유성기업이 가족기업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소모임이 활성화돼있었어요. 축구, 배드민턴, 탁구, 볼링, 헬스, 등산, 낚시, 심지어 수석까지 온갖 종류의 취미 소모임이 있고, 거기에 충청도 사람들의 충우회, 호남향우회, 경우회 등의 지역모임, 학교 동문회 등이 있어요. 또 생산라인에 들어가면 공정별로 라인이 다른데 공정별로 모임이 있었죠. 그런 모임들이 거미줄처럼 엮이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이 어용노조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자신들끼리 뭉치는 소모임을 강화시킨 거예요. 그래서 모임에서 한 명이 개인적으로 노조생활이 힘들어서 흔들리면, 나머지 사람들이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문제를 들어주고 다독여주고 계속 노조에 남게끔 조직을 하는 것이죠. 즉 친지들인데다 여러 소모임으로 내부 결속력이 아주 높은 편이었던 것입니다.

근데 가끔은 여러 명이 한 명의 논리에 말려 넘어가서 한꺼번에 어용노조로 가기도 했어요. 사실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문건에 보면 키맨(key man)’을 잘 활용해야한다고 나오는데 사측과 창조컨설팅은 실제로 유성기업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해서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을 세운 것이죠. 라인의 반장이나 지역모임이나 동문회의 회장 같은 사람을 구슬려서 사람들을 싹 빼오려했어요. 이것을 보면 얼마나 사측이 노조파괴를 위해 면밀히 분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11년 직장폐쇄 기간에 공장 밖에 하우스에 있을 때 그런 전략을 활용을 많이 해서 조합원의 반 이상이 공장으로 들어갔어요. 그래도 공장으로 들어가도 어용노조에는 가입 안 하고 있던 조직들이 있었는데 이후에 우리 노조가 들어가서 그런 소모임 등의 조직을 내실 있게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 더 이상의 이탈자를 막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더불어삶과의 인터뷰 중 답변을 하고 있는 유성기업 지회 홍종인 전 지회장

 

 

그럼 민주노조를 지키면서 어려운 점은 어떤 게 있었나요?

그리고 힘들었던 점은 당연히 금전적인 측면입니다. 직장폐쇄 3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임금을 한 번도 못 받았고 가정을 부양하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빨리 돈 벌라고 압박할 것이고 부채가 쌓이며 고통이 심해졌어요. 그런데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201191일부터 단계별 강제 교육이 실시되었어요. 강성노조면 강, 다음은 중, 약으로 구분을 해요. 그 다음에는 징계를 했죠. 1, 2, 3차는 금속노조 조합원을, 4, 5차는 어용노조 순으로 징계를 단계별로 때렸어요. 1차 징계는 강도가 세서 당시 해고 23, 2차에 해고 4, 27명이 해고 되었어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강성노조원을 먼저 쳐야지 다음 단계 사람들을 어용노조에 포섭하기 쉽다고 생각한 거죠. 어용노조로 들어오면 봐주겠다는 식으로 징계를 이용해 회유작업 들어간 거예요. 당시 회유하면서 관리자들이 빚 진 조합원에게 실제로 돈을 꿔주기도 했어요.

그리고 20117월에 복수노조법이 시행 됐잖아요. 거기엔 교섭창구단일화 절차라는 게 있어요. 대표교섭노조를 선정해서 그 노조하고만 교섭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그것 말고도 사측에 소수 노조와 교섭할 수 있는 개별교섭권이 있는데 유성기업은 이걸 악용한 거예요. 창조컨설팅 문서에도 당시에 어용노조가 소수노조니깐 어용노조와 개별교섭 하고, 금속노조는 다수지만 교섭을 최대한 늦춰서 하지 말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2011년 당시 3개월 간 직장폐쇄로 임금 못 받고, 임금교섭 지연되는데 어용노조는 임금교섭이 빨리 되면 나중에 소급적용이 되니깐 오른 월급 받고, 거기에 사측에서 파업 때 일찍 들어오면 생산력 향상에 기여했다는 명목으로 생산기여장려금이라고 보너스까지 얹어줬어요. 금속노조가 아니라 어용노조로 빨리 들어와서 열심히 일을 하면 그만큼 돈을 더 준다는 것을 각인시킨 거죠. 이런 식으로 금전적인 압박이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거기에 더해서 금속노조에 계속 있으면 구조조정 1순위가 된다고 소문을 유포했어요. 최근 발견된 현대 문서에도 계속 왜 어용노조 (인원이) 확보 안 되느냐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201112월까지 이렇게까지 해도 어용노조 인원이 계속 확보가 안 돼서 결국 관리자들 49명을 투입시켜서 어용노조를 과반수 노조로 만든 거죠.

그런데 이런 어려움들이 있다 보니까 계속 조직력이 약해졌어요. 사실 한때는 유성노조에서 열 몇 명만 차이가 날 정도로 거의 과반을 잃을 뻔 했어요.

 

 

한광호 열사가 운명하신지 76일째인 5월 31일 열린 한광호 열사 추모 문화제

 

그런 상황에서 유성기업 노조는 어떻게 대응한 거죠?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탈자를 줄이는 방법은 집행부의 선도적이고 희생적인 투쟁뿐이에요. 그게 우리 (유성기업) 집행부나 금속노조, 민주노총은 우리 조합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고 항상 선봉에서 앞장서서 투쟁하는 것이죠. 그 일환으로 굴다리 투쟁 등이 이어졌던 거예요. 이 와중에 창조컨설팅 문건이 (2012) 9월에 발견되자 조합원들이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실제로 존재했고 이것이 우리 투쟁에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을 했던 거죠. 그런데 2012년이 대선 시기라서 이것이 다시 묻혔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해 10월에 굴다리에 올라가서 농성했고, 조합원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이탈을 멈췄어요. 제가 내려오는 날에는 어용노조로 이탈했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하고요.

 

 

20133월에 내려오셨죠? 당시 농성도 그러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요?

. 152일간의 굴다리 농성*을 했는데 그 굴다리가 조그만 움막 형태여서 제가 키가 185cm인데 다리를 쭉 뻗으면 머리에서 다리 끝까지 다 닿고, 천장이 낮아서 일어서거나 걷거나 하는 행동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리 근육이 다 빠져서 뼈밖에 없었어요. 이 농성의 가장 큰 장점은 회사 출퇴근 거리니깐 어용 노조도 보게 되고, 우리 노조원들도 보고, 회사 관리인들도 보고, 제가 고생하는 모습을 다 본거죠. 그 당시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내려오니깐 직접 그렇게 보니까 자신들의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 투쟁을 간부들이 나서서 주도했던 거죠. 파업하면 임금 못 받는데 그런 희생들을 다 감수했던 거예요. 제가 놀랐던 것이 저랑 같이 간부 했던 동지들이 한 달 월급 실지급액이 12만원, 많이 받으면 6-70만원, 누군가는 3-4만원도 받았다고 했어요. 그런 투쟁들이 있었기에 조합원들이 많이 버텨줬던 것 같아요. 어용들처럼 나만 먹고살겠다고 중간에 가버렸으면 우리들을 그렇게 믿어주지 않았겠죠.

그리고 앞서 말했던 소모임의 결속력이 더해졌죠. 그런 것들이 유성 노조의 힘이었다고 생각되고 나중에는 진짜로 억울해서죠.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싸우겠다는 오기,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사측도 더 이상의 이탈자는 없겠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어용 초창기 멤버가 정년을 앞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어용노조에 들어가면서 요구했던 게 정년 연장이었거든요. 지금 5-6년차라서 그 사람들이 나가고 있어요. 작년만 해도 10명 정도가 나가요. 근데 금속노조는 1-2명씩 나가거든요. 어용노조는 점점 줄어드는 거죠. 금속노조에서는 한 명도 안 받아주고 비정규직 형태로 어용노조원들에게만 1년 간 재고용을 열어놨으나 그것도 작년엔 안 했어요. 그래서 사측은 격차가 더 나기 전에 깨려고 하는 거죠.

* 152일간의 굴다리 농성: 홍종인 전 지회장은 지회장일 당시 노조파괴 중단을 촉구하며 20121021일 충남 천안 유성기업 앞 굴다리에 매달려 농성을 시작하여 건강악화로 인해 2013320152일 만에 고공농성을 중단하였다.

 

 

 

굴다리농성 당시 검강검진을 받고 있는 홍종인 지회장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2013.03.20)유성기업지회

 

 

돌아가신 이후 한광호 열사님은 어떤 분이셨는지는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떤 분이었습니까?

사실 저는 아산 공장이고, 한광호 동지는 영동 공장에 있어서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았어요. 같이 집행부 활동을 하면서 밀양 같은 곳에 연대 가서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나요. 제가 알기로는 어머니가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였는데 멀리 연대나 집회에 갈 땐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만두를 사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드시라고 말씀드리고 나갈 정도로 상당히 효자였고요.

그리고 성격은 좀 내성적이긴 해도 어디 빼지 않고 이런 저런 투쟁에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가겠다고 자진해서 나갔던 동지였어요. 우리가 관리자들이랑 계속 부딪힐 때 관리자들이 일부러 채증을 하기 위해 계속 도발하고 욕하면서 우리가 폭력적으로 나오도록 유발하는데 한광호 동지는 그런 문제를 따지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고소와 고발이 계속 이어지는데 한광호 동지에게 11번의 고소, 고발이 있었고 징계도 있었죠.

제가 광고탑 농성을 할 때도 매번 출퇴근 하면서 안부 물어보고 밥 올려주고 했던, 착하고 순진했던 그런 동지로 저는 한광호 동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소고발 총 1,000여회에 어느 조합원은 91회 고소고발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학적인 노조파괴라고도 불리는데 어떤 사례가 있었는지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2011년 직장폐쇄 전에는 사내에 CCTV가 없었어요. 파업 이후 법원 중재로 일괄복귀하고 나서 노동조합 사무실 출입구를 향한 CCTV2대가 생겼어요.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사무실에 오면 관리자들에게 너 거기 가면 안된다, 빨리 복귀 안 하면 징계한다는 전화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히 노동조합으로 오는 조합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부담감을 가지게 되죠.

파업 후 실질적인 노조탄압은 여기서 시작된다고 봐요. 실질적으로 처음 문건 속에 나오는 거는 채증 다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측은 법과 원칙을 지키겠다고 얘기했어요. 근데 이건 사실 너희들이 하는 행동을 다 불법으로 만들어서 처벌하고 징계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용역들이 처음에는 여기저기, 여자조합원들 화장실 가는 것도 감시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용역들이 빠지고 나니까 소속장 등 관리인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채증을 계속 하는 거예요. 쟁의행위가 발생하면 관리자 50-70명이 공장 앞을 막아서요. 싸움이 나겠죠. 거기서 관리자들은 머리 위로 휴대전화를 올려들고 채증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전문 카메라까지 구해서 들이댔어요. 그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확인해보니 이후 볼펜 동영상 녹음기, USB 녹음기까지 사용했어요. 심지어 회사 안에 큰 화분 같은 것들 뒤에 녹음기를 설치한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나중에 법적 증거자료로 우리를 얽어매는 거예요.

예컨대, 내가 화장실 가면 그 빈자리를 찍어요. 계속 촬영하면서 자리에 몇 분 비웠나가 나타나는 거죠. 그러고 나서 화장실 5분이면 충분한데 10분씩이나 다녀왔다면서 5분 임금을 까는 거예요. 물 먹으러 갈 때 소속장에게 보고 안 하고 가면 그만큼 월급 깎고... 항의하면 다 채증하고, 대들고 욕 했다고 징계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쌓여서 한 사람 당 수십 건이 되는 거죠. 작년 아산 경찰서에 고소 고발 접수된 것만 해도 130여 건이었어요. 거기서 추리고 추려서 조사 받을 것만 해도 70여 건이었죠. 그래서 아산경찰서 3층에는 유성기업 전담반이라는 게 있었어요. 130여 건 중에 주로 간부들은 한 사람이 여러 개 걸리는 경우가 많고 그 중 한 명이 한광호 동지였던 거죠. 이들을 계속 징계하는 이유가 있죠.

 

 

그런 가학적인 노무관리로 인해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피해가 심각하다고 들었습니다. 쉽지 않지만 그 얘기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까 얘기했던 대로 징계로 월급 못 받고 경찰조사 받아야하니까 월급 못 받고 기소되면 법원 가니까 또 월급 못 받아요. 근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에 대한 억울함이에요. 사실 관리자가 먼저 시비를 걸어서 나는 그에 대응한 것뿐인데 관리자는 채증을 했고, 나는 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누명을 쓰는 거죠. 이에 대해서 해결이 돼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속에서 썩어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우울증, 분노조절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알코올 중독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돼요. 정말 심각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 분노조절 장애가 생긴 사람은 약을 먹지 않을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한다거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자해를 하고, 관리자를 죽이겠다고 집에서 매일 칼을 갈아요. 그래서 결국 휴직계나 산업재해신청을 하죠.

한 친구는 관리자랑 싸움이 붙었다가 이게 다 채증이 됐는데 자신은 그런 상황을 기억 못하는 거예요. 이후에 법원에 가서 자신은 노동조합도 모르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으니 선처해달라고 그랬는데 안 받아들여졌어요. 그러고 나서 옥상 올라가서 자살을 시도하든지, 자기도 모른 채 폭력적 행동을 한 뒤 기억상실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진 거죠. 그 친구는 이후에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노조파괴가 노동자 개인을 넘어서서 가정까지 파괴한다는 거예요.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표출하는 거죠. 어떤 이는 집에 와서 애들을 계속 때리고 있었는데 집사람이 와서 왜 이러냐고 물어보니까 자신은 아이들을 왜 때렸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는 병원에 입원해서 약 먹고, 또 나와서 계속 한 길만 걷는데 자신이 왜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결국 노조파괴로 인해 노동자가 자신에게 1차 가해를 하고, 가족들에게 2, 3차 가해를 하는 거예요. 그 폭력을 본 아이들은 아빠가 무서워서 아빠 옆에 있는 가방을 못 가져갈 정도였대요. 그러니까 노조파괴는 한 노조를 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모든 것을 말살시키는 중대한 범죄라는 거예요. 또 이혼, 별거, 개인파산을 하고, 인간관계, 가족관계는 파괴되는 거예요. 이렇게 스트레스가 많으니 뇌출혈도 발생하고, 또 시신경이 터지면서 한 쪽 눈이 거의 실명되고...

일반적으로 정신건강 관련 산재는 산재의 원인이 직장인지를 따지기 때문에 산재승인이 까다로운데 유성의 경우 심리적인 것은 산재승인이 잘 되고 있어요. 사측은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측과 현대차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죽든 상관없다는 입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거죠.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비교해보면 유성기업 정신질환 산재 승인율(66.7%)은 최근 5년 간 전체 정신질환 산재 승인율(36.7%)보다 2배 가까이 높다.

참고: 노조파괴 악명 유성기업, 우울증 산재 판정 또 나왔다”(한국일보 2016.04.02.)

또한 2015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장경희, 2016: 46-53) 우울장애 고위험군 43.3%, 상태불안 고위험군 22.1%, 사회심리스트레스 고위험군 64.5%,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위험군 53.6% 등으로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다. 특히 상태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은 여타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노사분쟁을 경험한 사업장 노동자들보다 월등히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장경희 (2016),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피해현황”, 2016329<전쟁 같은 일터, 당장 멈춰: 노동자 존엄과 생명을 파괴하는 가학적 노무관리> 토론회 발표문.

 

 

 

이런 일이 있을 때 유성기업 사태를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경찰, 검찰 등 공권력의 힘을 빌려서 해결하라고 말하잖아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나 정부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나요?

가장 불만인 건 유성기업 사측과 현대차 본사와 접촉한 문건이 발견됐고, 검찰이 압수수색을 했고, 그 압수수색 자료에 더욱 정확하게 현대차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국가기관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증거를 가지고도 증거 불충분, 무혐의라고 하면서 불기소를 했어요. 그만큼 확실하게 지시를 한 내용과 증거가 있는데 불기소를 한 이유가 뭘까 싶어요.

그런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이명박 정부 시절에 전반적인 노조파괴가 이뤄졌고, 창조컨설팅은 이미 국정원, 청와대, 노동부 등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유성기업 문제는 사실 현대차와 유성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자본과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권력이 합세된 노조파괴 시나리오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방에서 아무리 검찰에 문제제기를 해도 자기들은 중앙의 지휘를 받고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권한이 없다는 얘기를 계속 해요.

저는 그때부터 최근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져 온 친자본주의 기조 속에 유성기업이 있었다고 봐요. 처음에 타임오프제, 복수노조법,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성과급제도, 쉬운 해고 등을 포함한 노동개악 이런 것들이 쭉 이어지는 과정에서 유성도 있었던 거죠. 자본이,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친자본주의 기조를 완성시키기 위한 일종의 시나리오가 가동됐고, 이런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시 일어났던 유성을 포함한 노조파괴는 장기적인 노동권 약화 시나리오 속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속에 복수노조법이 악용되는 첫 사례가 유성기업에 있었고 이것이 전례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들은 법적으로 여기서 밀리면 안 되니까 법 제도를 통해 정당화시키기 위해 시간을 끄는 방식을 택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우리 경우에 노동자들이 기소한 한 사건으로 아직 1심도 안 끝내고 5년까지도 끌고 있는 거죠. 이게 말이 안 되죠. 그렇게까지 질질 끌고 있는 것은 공권력과 현대 자본이 같이 계속 개입돼있었던 이 사건에 대한 선례를 남기기 싫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봐요.

그리고 예컨대 여기 양재동에도 현대자동차 경비업체가 따로 있어요. 여기 앞에 정장입고 있는 사람들인데 거기에 청와대 경비팀장 출신이 있다고 해요. 그런 관계가 다 연결돼있는 거예요. 전관예우 받는 변호사가 많은 김앤장 같은 곳과 비슷한 맥락인 거죠.

국가기관이든 기업이든 다 연결돼있는데 그런 걸 보면 우리 노동자가 그들에 앞서거나 그걸 바꿀 수 있는 능력이 너무 부족한 거죠. 그나마 양심이 있는 판사를 만나야 하는데 문제는 그 판사를 만나기 전에 검찰이 기소조차 안 한다는 거죠. 기소를 해야지 이 사람을 처벌하든 어떻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고등법원에 재정신청(裁定申請)*까지 한 거죠. 법원에서는 이런 혐의가 인정되니까 다시 검사에게 지시를 내려 빨리 기소를 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유시영이 재판을 또 받고 있는 거예요.

* 재정신청: 국가기관인 검사가 고소나 고발 사건을 불기소하는 경우, 그 결정에 불복한 고소인 또는 고발인이 법원에 그 결정이 타당한지를 다시 묻는 것.

 

 

유성기업 노조가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양재동 현대차 본사

 

 

결국 국가적 차원의 정의의 문제라는 말씀이신가요?

사실 시청광장에서도 느끼는 게 2011년도 유성에서 용역깡패들이 쇠파이프, 해머 같은 무기를 들고 아무리 불법적인 행위를 해도 경찰이 제지하거나 체포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저희 영상에도 다 있는데 그것을 보고도 방치하는 거예요. 근데 여기 현대자동차 와서도 아까 얘기했던 현대차 경비업체가 우리를 막고 들추어내고 때리고 하는 걸 보고만 있어요. 그러면 어떤 때 말리냐? 우리가 거기에 반항하거나 저지할 때, 그럴 때만 와서 말려요. 이게 지금 경찰의 태도예요. 그러니까 2011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전혀 없는 거예요.

근데 그 과정에서 채증되는 건 노동자들이에요. 용역들이 하는 건 채증도 안 해요. 또 경찰들이 우리 침낭을 뺏거나 할 때마다 무조건 채증조가 와요. 자기들은 공무집행한다는 이름으로 하는 거죠그 비닐 조각 하나 뺏는 것도 공무집행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 비닐조각을 잡고 있거나 그들 손목을 잡으면 공무집행방해가 되죠. 조금만 더 막으려고 하면 폭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라고 하죠... 그 과정을 다 채증하고 (소송을) 거는 거예요. 회사에서 당하는 걸 밖에서도 경찰에게 똑같이 당하는 거예요. 법이든, 검사든, 경찰이든 우리를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 거죠.

정말 이건... 노동자를 위한 법이 있는지부터 묻고 싶어요. 아니면 우리는 노동자란 이름으로 국민이 아닌 사람이 되는 건지 이런 생각들이 계속 들어요. (노동조합) 조끼만 벗고 다른 데 가면 국민 대우를 받는 건가? 이 조끼를 입게 되면 나에겐 법이 적용되지 않는, 그러니까 항상 법 위반자로 보이고, 채증 당해야 하고, 고소 당해야 하고, 연행돼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자본은 또 헌법을 어기면서 법을 계속 악용하고, 국가는 그것을 또 받아주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쟁의권을 확보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하는데 사측은 시설보호권으로 맞대응하고 있죠. 이미 대법원 판례를 보면 쟁의행위를 통해서 사측의 물량생산에 타격을 주는 것은 합법적인 것인데, 사측에서 시설보호를 한다고 하면 그걸 더 우선해주니까, 사측이 무엇이든 내밀면 합법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우리를 보고하기 위한 것은 불법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노동자들을 위해 적용되는 법 아니냐하는 문제 속에서 투쟁을 하고 억울함에 분노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그러한 억울함으로 노동자가 사망하게 된 거고요.

 

 

더불어삶과의 인터뷰 중 답변을 하고 있는 유성기업 지회 홍종인 전 지부장

 

마지막으로 더불어삶 시민회원이나 2-30대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습니다.

유성기업 투쟁 전에 동희오토, 발레오와 같이 우리와 비슷한 사업장에 연대를 자주 다녔습니다. 당시에 그들이 얼마나 절실한 마음인지를 모르는 상태였는데 막상 실제로 당하고 느껴보고 당사자가 돼보니까 무엇이 절실하고 왜 이렇게 억울한지를 알게 되었어요.

2-30대 젊은 친구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가끔 물어보면 자신은 사무직에 일해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오해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우리 모두는 노동자이고 언제든 자신이 불리하고 억울한 상황에 몰릴 수 있어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노동조합이 기업에 의해 파괴됐는데, 지금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연대하면 결국은 이후에 내가 당할 때도 똑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런 상황을 잘 알릴 수 있도록 노력을 해주셨으면 한다는 것이죠. SNS가 됐든, 선전물이 됐든, 청와대 게시판에 입법발의해달라고 쓰는 것이든, 아니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든 자발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알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내가 대학생들에게 부탁했던 것이 우리 일정이 페북 같은 SNS에 올라가게 되면 공유든 여러 형태를 통해서 그 사실이 좀 더 알려질 수 있게 노력해줬으면 한다는 것인데 최근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처럼 SNS를 통해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지면 좋겠지만 최소한 현대자본이 왜 이렇게 노조를 파괴하러 들어왔었고 현재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금 더 확산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아니면 한 번씩 양재동에 와서 얼굴 보고 힘 보태 주셔도 좋고요.

이런 SNS의 움직임이 활성화된 게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인데 그런 방식으로 좀 확산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동조합이 있어야, 노동자의 권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노조탄압 유시영과 정몽구는 고인에게 사죄하고 노조탄압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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